
망했다. 거문이 1000미터 경주에서 12번이다. 12번이면 우승은 물 건너 갔다.
12번이면 왜요? 12번이면 안되는 거에요?
경린이라서 넌 모르겠구나. 바깥쪽 게이트면 우승이 어렵단다.
제가 경마 초보, 경마어린이니까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경린아, 육상 경기에서는 곡선구간이 있으면, 100미터 경주는 직선이니까 상관 없지만, 200미터나 400미터는 곡선 구간이 있지? 그럼 어떻게 해? 1번 선수 보다는 2번 선수가, 2번 선수 보다는 3번 선수가 얼만큼 앞에서 뛰지? 그래서 8번 선수는 1번 선수보다 한참 앞에서 뛰어. 그래야 모두 똑같이 200미터를 뛰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경마는 달라. 1번 선수나 12번 선수나 똑같은 위치에서 뛰게 해. 그러니 결승선까지 뛰는 데 12번 선수는 1번 선수보다 한참 더 뛰어야 되는 거야.
경마는 그렇게 해요? 몰랐어요. 근데 왜 그렇게 해요?
글쎄, 그걸 모르겠어 나도. 아마 말은 가만히 있질 못하니 출발대에 가둬야 될텐데, 육상경기처럼 출발선에 차이가 있는 출발대를 만들기는 힘들었겠지.
그럼 바깥쪽에 배정받은 말은 엄청 불리하잖아요.
말도 못하지. 단순히 거리만 손해 보는게 아니야.
또 불리한 게 있어요?
한 두가지가 아니야. 한국 경마장 코너는 경사가 아주 심하거든. 그래서 말이 내측 펜스쪽에 붙으려고 다들 싸우지. 외측에서 출발하면 내측에 붙을 수가 없어. 그럼 코너를 외곽으로 크게 돌아야 돼. 또 손해 보는거지.
그럼 외측 말은 정말 우승하기 힘들겠네요.
한국 경마장에서는 그래. 내측에 붙지 못하고 뒤따라 가면 또 불리한 게 있어. 잔디주로에서는 앞에 가는 말이 날리는 흙이나 모래가 없어. 또 미국이나 일본 진흙주로는 부드러운 화산재라 뒤따라가도 불편이 없어. 한국 경주로 바닥은 굵은 모래야. 앞에서 뛰는 말이 뒷발로 모래를 날리는데 그게 단순한 모래가 아니야. 60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면서, 60킬로 속도로 쏘는 모래니까 합하면 120킬로 속도로 날아오는 모래야. 모래총, 샌드건 수준이야. 그거 맞으면 말이 뛰질 않으려고 해. 천천히 뛸 수록 고통이 덜하니 당연하지. 말을 나무랄 수가 없어. 경린이도 외국 경주 유튜브에서 찾아봐. 경주마가 거의 맨 얼굴이야. 한국 말은 죄다 얼굴에 가면 쓰고 로보캅처럼 눈 가린 망사가면을 쓰고 나와. 그래도 별로 효과 없어.
그 정도에요? 그럼 외측 번호 받으면 얼마나 불리해요?
수치로도 나와 있어. 1000미터 경주에서 1번마 우승 확률이 12.4퍼센트야. 2번마 13퍼센트. 12번마 우승 확률이 몇 퍼센트인지 알아? 3.4퍼센트야. 무려 4배 차이.
그럼, 경마가 경주마 능력 겨루는게 아니네요? 번호 잘 받으면 그걸로 끝이잖아요. 아 참! 베팅할 때 능력비슷하다 싶으면 무조건 안쪽 번호 찍어야 되겠네요. 좋은 거 배웠다. 댕큐!
그렇지. 그런데 웃긴다? 경린아, 마사회 심판이 채택하고 있는 원칙이 뭔지 아니? 경주마 능력주의란다. 경주마 능력주의! 말이 웃을 일이지만, 그래도 경주마능력주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