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관심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알아야 할 것에 비해 찾고 읽을 시간은 부족하다. 촛불정국 이후 한국의 관심은 온통 정치에 머물러 있다. 문재인 주연, 홍준표, 김정은이 상대역으로, 트럼프, 아베, 시진핑, 김정숙, 이설주, 김성태, 장제원 등 호화 배우들이 단역으로 펼치는 정치극이다. 드라마나 영화, 스포츠를 압도한지 오래다. 월드컵 축구도 묻히고, 지방선거도 묻혔다. 경마는 말할 것 없다. 이 현란한 정치극에 빠져 있던 내게 눈에 띄는 드라마가 들어왔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유명한 드라만가 보다. 네이버 검색하면 수십, 수백 개가 포스팅된다. 일본 NHK가 특집 드라마로 제작해서 지난해 3월 23일과 24일 양일간 방송한 '인연 ~ 달리는 기적의 망아지(絆〜走れ奇跡の子馬〜)'라는 특집극이다. 극에 등장하는 말 이름이 '리앙드노르(북쪽의 인연, 프랑스어)임을 감안하면 '리양-기적의 망아지가 달린다'로 번역하는 것이 맞겠다.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다. 후쿠시마현에는 '미나미소마'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전통적으로 말을 기르던 곳이다. 지역 축제로 '노마오이'라는, 500여명의 참가자가 임진왜란 시대 장수 복장으로 말을 달려 하늘 멀리에서 떨어지는 '어신기'라는 깃발을 먼저 잡는 사람이 우승하는 축제가 있다. 오랜 전통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축제를 위해 말을 기른다.
소마 마을에서 홀로 경주마를 생산하는 마쯔시다팜의 아버지 마사유키, 어머니, 아들 타쿠마, 딸 쇼코가 주인공이다. (딸 쇼코역을 맡은 배우가 '아라가키 유이'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다. 한국에도 팬이 많다고 들었다.) 아버지 마사유키는 G1 경주마를 생산할 꿈으로 비싼 교배료를 지불한 씨암말 '하루'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하루는 출산을 앞두고 있다. 쇼코의 오빠 카쿠마 또한 아버지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기고 '하루'의 몸에서 태어날 망아지 이름을 자신이 짓는다. '리양드노르'.
마을 축제에 참가하고 난 뒤, 아버지가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도쿄로 돌아가는 도중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다. 쇼코의 오빠 타쿠마는 마침 출산에 임박한 '하루'를 지키다 지진의 여파로 덮친 9미터 쓰나미에 밀려 '하루'와 함께 숨진다. 하루가 낳은 망아지 '리앙드노르'는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지진과 쓰나미로 마을은 모두 파괴되고, 대부분의 말도 사라졌다. 방사능에 오염된 땅에서는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의 대피소와 같은 공간인 신사(神社)에 모여 구호물품으로 생활하며 마을을 복구한다. 마사유키가 어렵게 찾은 생존한 말의 주인도, 생활이 어려워 눈물 흘리며 말을 포기한다. 좁은 공간에서 희망없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점차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긴다. 비난은 도망간 말을 찾고, 어미 말을 잃어 초유도 먹지 못해 허약한 리양, 그 리양을 살리기 위해 두 시간마다 젖 먹이며 정성을 기울이는 아버지 마사유키에게 집중된다.
말도 없고, 생활도 엉망인 상태에서 '노모오이' 축제일이 다가오고 마을은 이 축제를 계속할 것인지 고민한다. 마사유키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축제는 이어가야 하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해서 '노모오이 축제는 다시 열린다. 축제를 계기로 마을은 희망을 찾고 복구에 앞장선다.
쇼코와 가족은 '리앙'을 오빠 타쿠마처럼 여기고 G1경주 출전마로 키우는데 몰두한다. 쇼코는 리양을 G1 경주 출전마로 키우는 것이 타쿠마를 기억하는 일이라 생각해서 젖먹이는 일, 관리하는 일에 집중하지만, 어린 리양은 결코 뛰지 않는다. 포기하고 도쿄로 떠나는 날, 트럭을 타고 떠나는 쇼코를 보자 리양은 활발한 걸음으로 달리며 따라온다. 리양이 달렸고, 걸음은 훌륭했다.
젖을 뗀 리양을 육성목장으로 보내 훈련시키기 위해 홋카이도를 찾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방사능에 피폭된 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마사유키는 육성목장을 포기하고 자신의 마을 미나미소마에 육성목장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미나미소마 마을은 모두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이다. 육성목장은 오염되지 않는 땅이 필요하다. 마사유키는 오염되지 않은 토지가 없으면, 그런 토지를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목장의 흙을 뒤엎는다. 이 과정에서 과로로 쓰러지고, 리양의 육성을 반대하던 어머니도 흙을 뒤집는 일에 동참한다. 이런 노력 끝에 리양은 훌륭하게 성장하고, 마침내 경주에 출전하는 말이 된다는 스토리다.
원작은 시마타 아키히로(島田明宏)라는 작가가 경마 포탈사이트 netkeiba.com에 2012년 6월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 연재한 경마소설, '리양- 어느 말의 이야기(『絆〜ある人馬の物語〜)' 를 대폭 수정하고 각색해서 제목을 바꾸어 발간한 '리앙-기적의 망아지가 달린다(絆〜走れ奇跡の子馬〜)'란 소설이다.
잘 만든 드라마다. 역대급이다. 씨비스킷, 드리머보다 더한 감동이다.
느낌이 복잡하다. 첫번째 느낌은 'NHK방송 답다' 이다. 일본 언론의 편파와 왜곡, 정권 편향은 세상이 안다. 철없는 사람들은 재난을 겪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개척정신과 불굴의 의지, 가족애를 그린 아름다운 드라마라고 극찬한다. 그렇게 감탄하고 '개척정신'과 '불굴의 의지'라는 병신 짓하라고 만든 드라마다. 왜 원자력을 후쿠시마에 집중해서 지었는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자민당 정권의 정치자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원자력 발전소의 관리는 얼마나 부실했는지, 후쿠시마와 도쿄의 방사능 오염은 얼마나 심각한지, 방사능 오염실태를 감추기 위해 정부가 어떤 법을 만들고 정보를 왜곡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피해 입은 국민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일본 정부의 과실이나 책임은 묻지 말고, 자연재해이니 국민 각자가 알아서 감수하든가, 열심히 복구하든가, 희망을 가지든가 하라는 개돼지 국민 양성 드라마다.
두번째는 느낀 것은 유혹과 암시의 힘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거론된다. 두 정상이 만나서 분계선에서 악수하는 모습, 성명서 서명 후 포옹하는 모습, 도보다리 회담, 만찬장 모습 등 사람마다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린다. 나는 회담장의 금강산 그림을 설명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금강산을 수십번 가서 보고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회담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김정은의 몫이다. 하고 많은 그림 가운데 왜 금강산 그림을 걸었을까? 작가가 수십번 금강산을 가보고 그렸다는 이야기는 왜 했을까? 인간은 글자를 기억하는 동물이 아니다.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시각과 청각 기억이다. 말은 잊지만, 본 것은 잊기 어렵다. 회담장과 그림은 잊지 못한다. 가장 강한 설득은 유혹과 암시다.
마음에 드는 핸드백을 갖고 싶을 때 '저거 사줘'하는 여자는 없다. '어머 저거 멋있다.' 그리고 그 핸드백에 몰입한다. 애정을 담북 담은 시선을 보낸다. '요즘 이런게 유행이야' 또는 손에 든 핸드백을 보이며 '이 핸드백 산지 10년 됐는데...'라 말한다. 드라마 또한 은유와 유혹을 통해 사람을 설득시킨다. 이 드라마도 아베의 메시지가 단 한 마디 없지만, 이쁜 여배우와 경주에서 달리는 말을 보며 '정부를 비판하지 말고 알아서 열심히 재건하고, 나머지 국민은 후쿠시마 이재민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라'고 설득한다.
세번째 느낌은 부러움이다. 전국민이 경마를 알고 G1레이스가 뭔지를 안다. 경주마를 키우고, 대상경주에 출전시키는 스토리가 국영방송 드라마로 방영될 정도로 일본사람들은 경마를 좋아하고, 경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일본 경마가 이렇게 국민의 사람을 받게 된 계기와 역사는 따로 이야기해야 하지만, 우리는 꿈도 꿀 수 없는 환경이다.
이 드라마는 경마 포탈에 연재한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했다. 일본중앙경마회(JRA)가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각설탕, 그랑프리, 챔프 영화가 떠오른다. 마주나 조교사, 관리사를 사기꾼으로, 그리고 경마팬을 깡패집단으로 묘사하는 영화에 제작비 지원하는 우리 마사회와는 정말 다르다. 한국에는 경마나 말을 소재로 스토리를 엮어낼 경마에 지식 있는 작가가 없다. 마주협회나 마사회가 해야할 일이 경마 작가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이다.
p.s. 어떻게 찾아 보냐고 물을 사람 있겠다. 알아서 하시기 바란다. 젊은 사람은 묻지 않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