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혹해서 읽는 사람은 실망하겠다. 관심 끄시고 하던 일 마저 하시면 좋겠다.
내가 뭔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매주 꼬박꼬박 해외 경마소식이 온다.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왜 저스티파이보다 더 빠른 말이 2018년 프리크닉스 스테익스에서 3등 했나?"
라는 긴 제목이다. 무려 텍사스 오스틴 대학 교수가 쓴 논문이다. 읽다 보니 엠아이티(MIT) 교수 논문도 인용했다. 미국에서는 대학교수들의 경마 연구가 활발하다. 대학교수가 한 경주의 결과를 엄청난 데이타를 사용해서 분석했다.

출처:TRC May 2019 / Curlin: World #1 dirt sire / Bev Hendry / U.S. racing can significantly reduce horse fatalities / Sir Michael Stoute / Why the one horse who ran faster than Justify was only third / Dawn Lupul / P18
일반 경마팬은 모르겠지만, 경마장에는 수많은 전설이 있다. 몇개의 모호한 유적이 있고, 입술 두툼한 사람이 그럴 듯한 이야기 만들면, 주민 모두가 철썩같이 믿는다. 그중 하나가 '주폭의 전설'이다. (주폭이란 '말의 한 걸음 길이'다)
'우승하는 말, 잘 뛰는 말은 목쓰임이 좋아야 하고, 목쓰임이 좋아야 주폭이 길다, 명마 타보면 말의 뱃가죽이 땅바닥에 닿는 느낌이다, 타봐야 안다, 어떤 말도 그랬고, 어떤 말도 그랬다'
이런 전설이다. 미국도 다르지 않아서 주폭신화를 믿는다.
'우승하려면, 또는 잘 달리는 말은 주폭이 길다. 우승마 맞추려면 주폭을 봐라, 최대 주폭을 알면 우승마를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켄터키 더비 열리는 경마장에 새크리테리엇, 존헨리, 맨오워 주폭 적은 말뚝이 보기 좋게 박혀있다. 새크리테리엇은 24피트, 존헨리는 25.5피트, 맨오워는 무려 28피트였단다. 한걸음에 8미터 53센티 뛰었다는 말이다.
사실일까?
엠아이티(MIT) 교수가 실제로 그런지 검증해봤다. 실제로는 24.8피트였다. 논문 쓴 교수가 다시 현대 장비로 측정해보니 25.4피트였다. 28피트는 주폭 편집증이 만든 전설이었다.
우승마 예측하는데 주폭이 정말 중요할까? 프리크닉스 스테익스는 명마만 출전하니 일반 말과 비교해봐야 한다. 이건 최근에야 가능해졌다. GPS를 사용해서 미국과 영국, 일반 말 수천마리를 분석하고 그걸 명마와 비교해봤다. 결론? 연구자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주폭이 전부는 아니었다.
호주의 암말 윙크스는 주폭이 21.5피트에 불과했지만, 33연승을 거둔 게 좋은 사례다. 2018년 프리크닉스 스테익스 분석결과도 이사실을 잘 보여준다.

출처:TRC May 2019 / Curlin: World #1 dirt sire / Bev Hendry / U.S. racing can significantly reduce horse fatalities / Sir Michael Stoute / Why the one horse who ran faster than Justify was only third / Dawn Lupul / P18
위 그래프는 2018년 프리크닉스 스테익스에 출전한 말들의 구간별 주폭이다. 우승한 저스티파이는 6위한 스포팅챈스나 텐폴드에 비해 주폭이 짧다. 최대 주폭으로만 따지면 저스티파이는 3등이다. 그럼 저스트파이는 어떻게 우승했을까?
저스티파이는 구간별로, 21피트, 26피트, 25피트, 23피트로 뛰었다. 텐폴드는 최고 27피트로 뛰었지만 이 주폭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평균으로 따지면 저스티파이가 23.9피트, 텐폴드가 23.8피트였다. 그럼 우승마 예측에 최대주폭이 아니라 평균주폭이 중요하다는 말일까?
앞에서 예시한 호주 암말 윙크스를 기억하자. 주폭은 21.5피트였지만, 이 암말은 다른 말보다 초당 걸음수가 많았다. 다른 말이 일초에 23번 뛸 때, 이 말은 27번 뛰었다. 대단한 일 아니다. 속도는 주폭 곱하기 초당 걸음수라는 건 산수문제다.
속도 = 주폭 × 초당걸음수
아래 그림은 프리크닉스 스테익스 출전마의 주폭(수평축)과 초당걸음수(수직)를 보여준다. 저스티파이의 평균주폭은 6위마와 같다. 왜 6위고, 1위일까? 저스티파이의 초당걸음수가 6위마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출처: TRC May 2019 / Curlin: World #1 dirt sire / Bev Hendry / U.S. racing can significantly reduce horse fatalities / Sir Michael Stoute / Why the one horse who ran faster than Justify was only third / Dawn Lupul / P18
연구자는 지난 9년간의 경주결과를 분석해봤다. 주폭은 길수록 좋고, 걸음수는 많을 수록 좋다. 하지만 주폭이 길수록 걸음수는 적고, 걸음수가 많을 수록 주폭은 줄어드는 상극관계다. 그럼 주폭과 걸음수를 표시한 점이 오른쪽 위에 있을 수록 더 빠른 말이다. 그래서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선을 그으면 같은 속도를 내는 걸음수와 주폭이다. 그럼 말의 성적을 뚜렷하게 표시할 수 있다. 결과로 보면, 9년 동안 걸음수로 우승한 말은 한 마리였고, 주폭으로 우승한 말은 두마리였다. 나머지 여섯마리는 '주폭×걸음수'로 이겼다.
결론이 싱겁다. 긴 주폭에, 걸음 빠른 말이 우승한다는 이야기다.

출처: TRC May 2019 / Curlin: World #1 dirt sire / Bev Hendry / U.S. racing can significantly reduce horse fatalities / Sir Michael Stoute / Why the one horse who ran faster than Justify was only third / Dawn Lupul / P18
이런 싱거운 결론이라면 논문거리가 되질 않는다. 논문 제목이 '왜 2018년 프리크닉스 스테익스에서는 더 빠른 말이 3등했나?"였음을 기억하자.
지난 9년간의 결과는 주폭과 걸음수로 분석한 결과가 딱 들어 맞았는데 2018년 결과는 맞질 않는다.
주폭 곱하기 걸음수에서 3등한 텐폴드가 더 앞서 있다. 그럼에도 저스티파이가 1등했고, 텐폴드는 3등했다.
왜?

출퍼: TRC May 2019 / Curlin: World #1 dirt sire / Bev Hendry / U.S. racing can significantly reduce horse fatalities / Sir Michael Stoute / Why the one horse who ran faster than Justify was only third / Dawn Lupul / P18
연구자는 경주전개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경주를 분석해보니 저스티파이는 6,308피트를 뛰었는데, 3위 텐폴드는 6,341피트를 뛰었다. 텐폴드가 33피트 더 외곽으로 돌았고, 이기기 위해선 두 걸음이 더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기기록 공식은 말이 달린거리를 '주폭 곱하기 초당걸음수'로 나눈 값이 된다) 이게 논문 내용이다.
나는 세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미국에서는 대학교수가 이런 것도 연구하는구나'가 첫번째고,
'경주성적은 게이트와 상관 없다는 정신나간 마사회 관계자가 좀 봤으면 좋겠다'가 두번째,
'미국 교수들은 혈통같은 미신은 연구 안한다'가 세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