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마에서 기수의 역할은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경주마라도 경주에서 말몰이에 실패하면 우승을 거머쥘 수 없고, 반해 아무리 지지부진한 경주마라도 궁합이 맞는 기수의 뛰어난 말몰이로 때아닌 우승을 거머쥘 수가 있다. 경주마가 없는 경마는 있을 수가 없듯이 기수가 없어도 경마는 성립될 수 없다. 경마가 시작되면서 경주마와 기수는 근간이고 그 중 기수는 경마의 꽃으로 불린다. 둘 다 경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이 무겁다. 다만 경주마는 달리면 그만이고 승패에 책임을 동물이기 때문에 질 수가 없다. 비해서 기수는 승패의 결과를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기수만의 책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주마가 출전하려면 훈련을 통해 전력이 강화돼야 하고 경주 직전까지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여기까지는 관리 마방 직원들이 책임질 부분이고 총체적인 책임은 조교사가 진다. 조교사는 경주마들이 성적이 좋지 않으면 마방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경주마 수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우선 책임을 진다. 경주를 마치고 당장 팬들 앞에 힐책과 박수는 받는 것은 기수다. 현장에서 팬들의 일희일비를 몸으로 직접 받아내며 하루에도 수차례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하는 직업이다. 서울경마장에서 기수로 정년을 마치고 떠나간 김귀배 기수가 많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초년 시절보다 점차적으로 성적이 저조해지면서 좋은 말보다는 부진마 기승 기회가 더 많아 져 저조한 경주결과 때문에 받아야 했던 그의 스트레스는 얼마나 컸을까. 그는 한국경마 최초로 기수로서 한평생을 바치고 떠나갔다.
조교사는 하나의 우승을 위해서 경주마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 올려 적절한 적수를 만날 수 있는 경주에 맞춤 출사표를 써야 한다. 우승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줄 기수를 찾는다. 직전경주에 기수의 말몰이가 실패의 원인으로 규명되면 그 기수는 제외되고, 보다 적임인 기수를 찾아 고삐를 넘긴다. 아쉬움이 남는 우수한 경주마의 말몰이는 당연히 특급기수에게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급기수는 앉아서 좋은 경주마를 만날 수 있다. 조교사와 마주는 조짐이 좋은 경주마에게는 으레 문세영 기수를 찾고, 연이 닿지 않으면 부득이 차선의 기수를 찾게 된다.
차선의 기수에라도 들려면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어느 기수가 데뷔 후 오늘까지의 성적을 집계한 것을 통산 성적이라 한다. 서울경마장 현역 45명 기수 중 가장 많은 우승을 거둔 기수는 국민 기수 박태종이다. 37년간 2234승을 거뒀다면 한해 꾸준히 평균 60승을 거두었다는 놀라운 기록이다. 바로 뒤를 따르는 황태자 문세영 기수가 23년간 한 해 평균 83승을 거둬 1923승을 거두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박태종 기수가 청년에서 장년으로 체력이 내려가면서 승부가 내리막이라면 상승세의 문세영 기수는 우수마 선택의 0순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뒤를 이어 통산 성적이 500승을 넘긴 기수는 7명이다. 도합 9명이다. 김용근(910승/47승/19년), 최범현(906승/39승/23년), 신형철(797승/22승/36년), 조인권(685승/42승/16년), 김옥성(552승/14승/37년), 유승완(519승/30승/17년) 기수까지 총 8명이 통산 500승을 넘긴 상위권 기수들이다. 상위 8명의 기수 뒤를 이어 지난주 드디어 이혁 기수가 500승의 고지를 넘었다.
현역 아홉 번째 500승 달성한 기수 이혁은 한 해 평균 38승을 거두며 14년 만에 일궈냈다. 지난 2022년 9월17일 토요경마에서 ‘고업’을 타고 400승을 달성한지 1년 8개월 만인 지난 주 토요일 3경주 ‘용암세상’을 타고 드디어 500승을 거두었다. 이혁 기수는 이희영 조교사를 아버지를 둔 2대 계승 홀스맨 집안이다. 이희영 조교사는 서울경마장 현역 조교사 중 716승을 거둔 최다승 조교사다. 기수 양성학교 4기 출신으로 부산경마장 김영관 조교사와 동기로 1977년 데뷔해서 1986년 조교사로 데뷔하기 전까지 기수로써 두각을 보였었다.
한국야구에 이종범 바람의 아들 뒤를 이어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바람의 손자 이종범이 있듯이 한국경마에도 최일선 명조교사의 뒤를 이은 ‘대견’, ‘청파’등 다수의 명마를 배출한 최혜식 조교사도 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경마세계에 역시 피를 못 속이는 부자간 대를 잇는 것은 여느 세계와 달리 의미가 깊다. 이종범을 뛰어넘을 이정후가 있듯이 이희영을 훨씬 뛰어 넘을 이혁 기수의 장래는 촉망된다. 이유는 숫자로, 기록으로 증명된다. 작년 2023년 한해 문세영 기수가 96승으로 최다승 1위를 했을 때 승수 차는 있지만 56승으로 2위로 올라섰고, 올해5개월이 지난 현재 49승을 거두며 멀찌감치 내빼는 문세영 기수의 뒤를 최근 싱가포르 경마장에서 온 말레시아 국적의 용병 씨씨웡과 장추열 기수와 함께 26승, 24승으로 치열한 경쟁 속에 뒤를 따르고 있다.
이혁 기수의 매력은 우수한 경주마와의 우승 보다는 저조했던 부진마의 잠재된 경주력을 끌어내는데 있다. 일테면 비인기마를 입상시키는데 다른 기수들과 차별된다. 더 재미있는 현상은 인기마와의 우승에 뒤따르는 동반 입상마가 공교롭게도 비교적 비인기마인 경우가 많아 이혁 기수의 입상시 복승식 배당이 상당히 높다는 것 또한 매력적이다. 특히 소액으로 경마를 즐기는 팬들의 절반은 이혁 기수의 우승에 환호와 응원의 목소리가 높다. 소액으로 경마를 즐겨온 팬들은 입상률 높은 문세영 기수보다는 이혁 기수에게 항상 응원을 보낸다.
지난 토요일 500승 당시 소액으로 경마를 즐겨온 팬들의 박수소리가 서울경마장을 뒤흔들었다. 다치지 말고 지금 이대로 쭈욱 건승을 이어가기 바란다.